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는
[월간삶디] 또바기 졸업합니다

[월간삶디] 또바기 졸업합니다

우리에게는 작별의 말이 없어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한 명의 동료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녀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점심에 나무젓가락으로 컵라면을 먹을 때, 밖에서 테이크아웃 잔에 커피를 담아 왔을 때, 인쇄하려고 에이포 뭉치를 만지작거리다 그녀가 뒤에 서있진 않을까 멈칫했습니다. 또한 종종 그녀를 놀렸습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은 사무실에 들어서며 배에서 끌어올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외칠 때, 만나는 이들의 희로애락에 일일이 반응할 때, 몸속에 인공지능 스피커가 있냐고 놀렸습니다. 그녀는 ‘기후위기 앞에 무엇이 더 중할까’ 생각했고 두 해 전에 청소년 기후행동〈1.5도씨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학교를 떠난 이들을 ‘학교밖청소년’이 아닌 ‘자기주도청소년’이라 부르며〈배움공방〉을 꾸렸고 작년엔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궁금해 제주와 서울의 십 대들과 〈포스트 코로나 인류학〉이라는 것을 공부하기도 했지요. 지구와 생명을 끔찍하게 위하는 만큼 하나하나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해냈던  쫌 이상한 동료. 그녀는 삶디 열린책방의 책방지기입니다. 열여덟 살에 이곳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스물둘이 된 올해 떠납니다. 내일이 마지막 출근. 삶디는 ‘바라는 삶을 키워내는 힘을 기르는 곳’이라는데 그녀도 뱃속 어딘가에 그런⋯
2021.02.26
[월간삶디] A는 B다

[월간삶디] A는 B다

나는 너다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A는 B다.  A는 B라는 명제는 담백합니다.  단호하고 묵직하기도 합니다.  <청소년 주도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지난 가을, 134명의 고등학생들이 이십여 가지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광주답게 배우도록 돕겠다’는 어른들의 약속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프로젝트 후기를 읽을수록 ‘A는 B다’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내 문제는 나만의 문제다.”  “공부의 결과는 성적이다.” “지금 다니는 학교만 학교다.”  오래된 명제입니다.  하지만 석 달 동안 광주 곳곳에서 삶의 문제를 풀면서  우리 안의 A와 B는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문제는 우리의 문제다.”  “과정이 공부의 결과다.” “광주가 학교다.”  내 몸에 좋은 생리대부터 내가 살기 좋은 나라까지,  나의 문제가 우리의 주제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빠띠 민주주의 활동가 학교>를 마친 ‘사차’는  “개인의 경험이 공적인 가치가 있음을 느꼈다”라고 했고요.  IT, 환경, 정치, 경영, 역사 등 분야는 달라도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의 생각을 말하고  나아지기 위해 같이 움직이는 과정이 공부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학교가 된다면  나의 주제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좋은 친구와 좋은 어른을 만날 수 있다면   세상은⋯
2021.01.29
[특별호] 생일상에 45쪽짜리 책을 올리며 🎂

[특별호] 생일상에 45쪽짜리 책을 올리며 🎂

고마워요, 덕분에 네 살 됐어요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삶디 개관 4주년을 맞아 특별하게 인사드립니다. 4년 전 오늘, ‘삶디’라는 마을이 문을 열었습니다.  배움의 기쁨으로 풍요로워지는 삶의 정원을 희망하며 말입니다.  그간 작은 씨앗을 품은 여러 노리들이 삶디에 뿌리를 내렸고,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잎이 돋아났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의 지금을 찾았다.”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도전해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위로받았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걸었던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물론 그들이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서의 경험으로 각기 다르게  또 힘차게 줄기를 뻗어 올릴거라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손수 물건을 만들고,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요리도 하고, 땅을 만지며 농사를 짓는 움직임이  그들을 생기 있는 삶으로 이끌어주었을 테니까요. 노력의 결실을 서로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시공간에서  새로운 존재로의 탐험이 다양하게 펼쳐졌을 테니까요. 그렇게 정성으로 일궈온 무형의 자산이 든든하기에  불안과 두려움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2020.11.05
[월간삶디] 초록이 다했다

[월간삶디] 초록이 다했다

시월의 초록 이야기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초록이 다했습니다.  초록은 노랑과 빨강, 빨강과 갈색, 갈색과 회색,   혹은 회색과 없음 그 사이로 사라지는 중입니다.  그동안 벼리들이 써둔 글을 들여다봤습니다.  비대면 생활을 엮느라 지나쳤던 글이었습니다.  카페 크리킨디의 ‘바질 토마토 에이드’ 이야기,  삶디에서 채종한 배추, 무 씨앗을 나눠 기르는 열한 명의 농사일기,  반딧불 빛을 닮은 포스터를 내걸었던 ‘광주광역시를 향한 1.5마디’ 캠페인 후기까지.   글도 사진도 유난히 초록스러워 궁금했습니다.  ‘우리의 일을 색으로 말한다면 초록 아닐까.’  ‘그런데 왜 이 계절에도 우리는 초록을 말하고 싶을까.’  답을 내기 전에 노리 ‘달복’이 쓴 에세이가 문득 떠오르네요.  그녀는 땀내 나고 따가운 여름을 싫어했지만 올해 여름은 기다려지고,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만나 인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달복은 생명을 마주하며 나는 살아있고 우리는 함께 있다고 느끼고 싶었겠죠.  이번 호를 엮는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꼭 같습니다.   여름, 혹은 초록, 또는 생명을 기다리고  또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은   다른 존재와 이어져 내 목숨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존과 공존이 위태로운 시절이니까요.⋯
2020.10.31
[월간삶디] 비대면생태보고서2 《우리가 쓰는 도구들》

[월간삶디] 비대면생태보고서2 《우리가 쓰는 도구들》

만들거나 만나고 싶응께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먹을 것을 구하는 중입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날카로운 돌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20만 년 전 사람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는 중입니다. 나갈 수 없어 핸드폰을 쥐고 배달 어플을 누릅니다. 나는 2020년에 살고 있습니다. 손안의 돌과 핸드폰이 겹쳐 보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도구를 씁니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겠지요. ‘톱과 망치, 칼과 도마, 바늘과 실’ 삶디에 있는 ‘도구’들을 생각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놀고 있어요. 먼지 앉을 지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공방이 많습니다. 일부러 그리 지었습니다. ‘만들 수 있다면 살 수 있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전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만나면 안 된다’는 세상의 주문과 ‘만들며 살자’는 이곳의 주제가 쾅하고 부딪쳤습니다. 하지만 여덟 달을 보낸 지금은 말할 수 있습니다. 만나지 않고 만들어야 했고, 그럴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어렵고 두려워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어라, 혼자 하는 힘이 생기잖아.”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은 사람들과 온라인에서 만나 ‘떡볶이’를 만들었습니다. 재료를 다듬고, 씻고, 요리하고 먹고 치웠고 레시피만이 아닌, ‘부엌일’을 몸에 익혀 좋았다고⋯
2020.09.26
[월간삶디] 비대면생태보고서1 《방과 후 1열》

[월간삶디] 비대면생태보고서1 《방과 후 1열》

N개의 방과후 프로젝트의 고백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 앞에 서있는데.”  1992년 히트작, 드라마 <질투>의 OST 한 소절이 귓가에 맴돕니다.   화상회의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벼리(삶디 직원을 부르는 말)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대체 어딜 보는지 모르겠어. 아는지 모르는지, 좋은지 싫은지 알아챌 수가 있어야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저 노래가 생각났고요.   만나는 법이 바뀌고 있어요.  역병이 막 돌기 시작할 땐 아랫돌 빼서 윗돌 끼우면 될 줄 알았지만, 더 이상 아니고.   그래서 올해 삶디의 벼리들은 ‘일의 뼈대’라는 ‘벼리’의 본래 뜻처럼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중입니다.   하루짜리 수업부터 석 달 프로젝트까지 다시 틀을 짜고 있어요.   처음엔 신박한 온라인 도구를 찾고 익히는 데 정신이 없었죠.  하지만 비대면으로 만날수록 고민은 짙어졌고 회의는 숱하게 늘었어요.  그리고 맺음말은 늘 같았습니다.   “하아, 이게 맞을까.”   비대면 학습을 실험하며 일 년의 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변화를 말하지만, 끝끝내 변하지 않을 것들을 생각해봤어요.  우리는 배우고 만들고 도우며 살겠죠,  끝끝내 연결된 채로.  이번 6월부터 8월까지, 서른아홉⋯
2020.08.28
[월간삶디] 354일 동안 집을 지었습니다

[월간삶디] 354일 동안 집을 지었습니다

마음씨 고운 목수들이 모여서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이웃에 마음 좋은 목수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라도 달려와 뚝딱뚝딱 고쳐주는 솜씨 좋은 손으로 이것저것 살펴주면 좋겠다.  비 새는 지붕 틈도 찾아내고, 곰팡이 핀 벽도 말끔하게 손질하고,  찬바람 드는 벽 틈을 막아 걱정 없이 겨울도 나고,   봄이 와 외벽에 고운 색을 함께 칠해주는   만능 동네 목수가 가까이에 있다면 정말 좋겠다.”  몇 해 전 읽었던 기사 ‘솜씨 좋은 동네 목수와 함께 산다는 것’의 첫 문단입니다.  이곳, 삶디 지하 1층에는 <생활목공방>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보쳉’이라는 목수가 있지요.  목공방 한 귀퉁이에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동료들의 메시지가 빼곡한데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저 글귀입니다.  ‘삶디 마을에 당신과 같은 동네 목수가 있어 정말 좋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오 년째 목공방에서  끌로 숟가락 깎고, 대패로 도마 밀고  톱과 망치로 책상도 만들고 있습니다.  혼자 쓰는 쪼그마한 것부터  두루 쓰는 큼지막한 물건까지,  누구나 만들어 쓸 수 있다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삶디 층층마다 그가 만들거나 고친 것들이 수두룩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집을⋯
2020.08.04
[월간삶디] 문제 많-은 농부들

[월간삶디] 문제 많-은 농부들

근디 우리가 농부여?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여기 두 명의 농부가 있습니다. 삶디 음식공방의 ‘필라’와 ‘라라’ 그들은 사 년째 마흔 평의 밭과  열 평의 논을 가꾸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이라는 간판 달고 십 대 농부요리사들과 일 년짜리 프로젝트를 하면서요. 어디서 하냐면요.  이름도 찬란한 ‘황금동’에서 합니다. 광주 사람들이 너나없이 ‘시내’라 부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라는 채소와 곡식들은  온갖 멋쟁이 구경하고, 최신가요 들으면서 크지요.  우리가 노동요 부르며 엄지와 검지로 어린 벼를 잡고 심을 때   바로 옆 옷가게에선 손님들이 엄지와 검지로 티셔츠를 들어 올립니다. 안 어울리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풍경. 필라와 라라에게  그들의 일과 생각을 써달라 부탁하며 물었습니다.  이번 호 제목이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요. “둘은 어떤 농부야?” 답이 뜻밖입니다. “우리가 농부 맞나?”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필라가 말을 잇습니다. “십 대를 잘 만나기 위해  함께 삶의 태도와 몸을 바꾸면서  배우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어. 누군가는 목공, 누구는 음악으로 만난다면  우리는 ‘음식’을 가운데 두고 만나지. 자연스레 농사도 하고 있지만,  먹을 것으로 사람과 배움을 잇고⋯
2020.06.26
12345...
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