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는
[월간삶디] 팬레터를 받고 얼굴이 빨개졌지

[월간삶디] 팬레터를 받고 얼굴이 빨개졌지

겸손은 힘들어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옛날에는 단 것의 최고봉이 곶감이었겠죠. 매우 귀해서 하나씩 천천히 음미한다는 뜻으로 옛사람들은 “곶감 빼먹듯”이란 말을 썼나 봅니다. 12월 30일은 마무리하기 더없이 좋은 날이라 곶감 빼먹듯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았네요. 십 대에서 오십 대에 이르는 독자들이 월간삶디에 보내준 답장을요. 내용이 낯 뜨겁고 기가 막힙니다. “스팸과 일거리로 가득 찬 메일함에 단비 같아요.”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곱씹고 아끼며 읽습니다.” “광주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 저 멀리서 벅차게 응원합니다.” 어휴. 옮겨 쓰기만 해도 얼굴이 벌게지네요. 이들은 종종 자기보다 나중에 태어난 이들을 향한 마음을 전했는데요. “청소년들과 어른들 사이에 공감대가 생깁니다.” “삼십을 앞두고 있는 지금도 사람들의 불편한 말들을 삼켜 넘길 때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 말들에 딴지를 거는 노리들을 보니 멋짐과 부러움이 엉킨 감정이 불쑥 올라왔어요.” 나아가, 읽는 동안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고백하기도 했어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 오롯이 나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도와주네요.” “‘홀로 됨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단지 선택의 문제인데 이해하지 못하는⋯
2021.12.31
[월간삶디] 지구에 큰일 났다고 소리라도 질러야 할까

[월간삶디] 지구에 큰일 났다고 소리라도 질러야 할까

아뜨거!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언제부터였을까. 길 곳곳에 현수막으로 인사하는 분들이 많아요. 추석 잘 보내라고, 한글은 위대하다고, 수능 대박 기원한다고요. 며칠 전, 같이 출근하던 동료가 물었어요. “저 현수막 보면 고3들은 힘이 날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단박에 답했죠. “아닐 것 같은데. 진심 뒤에 흑심이 있잖어.”  선거를 앞둔 뭇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려고 이런저런 날을 기다려 현수막을 걸고 또 걸어요. ‘악수 나누기 어려운 시절이라 어쩔 수 없겠지.’ 한편으로는 이렇게 그들의 최선을 이해합니다. 사무실에 도착해 청소년 기후행동 동아리 ‘1.5℃ 모임’의 글을 읽었어요. 그들은 KBS 기후위기 다큐 4부작 〈붉은 지구〉를 정주행 했는데 코 앞의 위기에 무뎌진 사람들이 꼭 보면 좋겠대요. ‘쓰담’은 다큐를 보고 이렇게 말했어요. “슬프다. 거리를 뛰어다니며 지구에 큰일 났다고 소리라도 질러야 할까?” “한국 대선에는 기후위기가 없다.” 그녀의 말은 징소리 같았어요. 몸을 울리더라고요. 아침에 본 거리 풍경이 난데없이 떠올랐고 망상을 했어요. 잘 보이는 데마다 쫙쫙 붙어있는 길거리 현수막에 “지구에 큰일 났다.”라고 쓰면 어떨까 하고요. 그리고 내년엔 양복 입은 대통령이 아닌 망토⋯
2021.11.26
[월간삶디] 너의 일기에 좋아요를 누르며

[월간삶디] 너의 일기에 좋아요를 누르며

꾸우우욱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학교에서 돌아와 내 방으로 직행, 가방을 벗어 책상에 기대어놓고 옷가지를 침대에 널어두다가 이상한 낌새에 다시 책상 앞으로 갑니다. 반듯하게 꽂혀있는 책들 사이에서 일기장만 비죽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앗, 엄마다. 숨기는 걸 깜빡했네.’ 애독자가 대낮에 다녀갔나 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제 옛날이야기예요. ‘쪼마니’와 ‘휴지’가 쓴 글을 읽다가 옛 일이 떠올랐네요. 동료들의 후일담도 반갑지만, 노리들의 글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스치는 표정과 몇 마디 말로는 알 수 없는 그들을 제대로 만나는 기분이 들어서요. 이래서 엄마가 제 일기를 구독하셨나 싶네요. 〈N개의 방과후 프로젝트〉라고, 봄과 가을마다 열리는 석 달짜리 프로젝트가 있어요. 그게 끝나면 노리와 벼리 모두 진이 빠지기 마련이죠. 그런데 쪼마니와 박력분은 음식공방에, 휴지와 여치는 시각디자인방에 남았습니다. 덥고도 황홀한 여름방학에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자신이 정한 과제를 마쳤습니다. 〈N개의 자기주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요. 그리고 두 편의 일기를 남겼습니다. 요리와 창업에 관심 있는 쪼마니와 박력분은 고등학생들의 경영 대회에 나갔어요. 삶디에서 스무 번 넘게 실험하며 사람들에게 맛 평가를 받았고, 버려지는 못난이 매실과⋯
2021.10.30
[월간삶디] 눈치챈 건가👀

[월간삶디] 눈치챈 건가👀

그것의 진리를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덥다, 덥다.”라는 말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나태주 시인이 말씀하시던데요. 잘 살고 계시죠?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목요일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삶디에 일순간 사람 기운이 돌았어요. 말소리는 거의 안 들렸지만 훈김이 났다고 할까요. 거북이 마냥 큰 가방을 메고 무채색의 교복과 신발을 신고서 길고 짧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살의 노리들이 왔거든요. ‘N개의 방과후 프로젝트’를 하려고요. 도착하면 그들은 주황색 도시락을 받아 들고 여러 방에 흩어져 저녁밥을 먹었습니다. 한때는 모두의 부엌에 다 모여 웃고 떠들며 먹었는데 말이죠. 크으, 재작년까지는 노리들과 인사하고 수다 떠는 재미가 쏠쏠했죠. 이젠 어렵고요. 그래서 ‘N개의 방과후 프로젝트’를 마친 벼리들의 글을 더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네요. 노리들이 남긴 말이 있고, 그것은 우리 일의 결과이자 단서니까요. 하늘색 형광펜을 들고 그들의 후기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어떻게 식탁까지 오는지를 배우고 가까운 데서 구한 재료로 요리했던 〈400리 식탁〉의 ‘쪼마니’는 요리를 잘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네요. “단순히 요리만 잘한다고 최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러 지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한다. 비록⋯
2021.07.31
[월간삶디] 나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월간삶디] 나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쉽지 않을걸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오늘은 제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유월, 비 갠 뒤 가시거리가 참 좋은 날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실에서 창밖을 한참 내다보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이었나 봐요. 저 멀리 있는 동네와 하늘을 보니 그것들의 색과 모양을 눈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때 담임 선생님이 곁에 와서 “오늘 가시거리가 정말 좋다.”라고 하셨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덧붙여 말했습니다. “가시거리는 사람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뜻해.” 선생님의 보조개가 함께 웃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가시거리’는 이 세상에서 그녀와 나만 아는 말처럼 느껴졌어요. 오늘 같이 맑은 날에는 이 네 글자가 절로 떠오릅니다. 그녀는 종종 우리들 앞에서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불렀는데 처음 알려주었던 곡은 ‘개똥벌레’였습니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로 시작하는 흥겹고 구슬픈 노래. 멜로디와 가사가 쉬워 우리는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습니다. 곧잘 해서인지 어느 날엔 칠판 빼곡히 가사를 4절까지 쓰시더군요.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흘렀네.” ‘터’라는 곡이었습니다. 아, ‘사계’도 배웠어요. “빨간⋯
2021.07.02
[월간삶디] 작은 것들을 위한 시간

[월간삶디] 작은 것들을 위한 시간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는 말이지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이번 달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봄이 언니’는 금요일 저녁마다 목공방에 왔다. 작은 고양이 ‘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며 나무로 장난감을 만들었다. 쥐잡기 놀잇감이었다. 끝난 뒤 “할 줄 아는 게 하나 더 생겨 기분이 좋다”라고 했다. ‘박력분’은 수요일 저녁마다 빵을 배웠다. 시작할 때 차를 마시고 글을 읽었는데 잔잔해서 좋았고 밀 이야기를 낭독할 때, 겨울 땅 속 밀알이 지금의 나 같다고 했다. “맨날 똑같은 하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라고 했다. 5·18 즈음, 달마다 독립영화 트는 ‘책방옆인디’에서 영화 <김군>을 올렸다. 관객 한 분이 한 번쯤은 5월에 광주에 있고 싶었다며 “이름 없이 싸웠던 시민군들의 밤이 편안했으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또 다른 이는 “민주주의를 더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됐다”라고 했다. <미얀마 평화손 만들기>에서 스물네 명은 마흔여덟 개의 손을 만들었다. 버스터미널과 5·18 민주화 광장에서 시민들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하나에 꼬박 네 시간이 걸리기에 누군가 끝내지 못하면 다른 이가 완성했다. 자리를 준비했던 벼리 ‘또니’는 이를 “또 다른 연대였다”라고 정의했다. 청소년운영위원회 ‘삶디씨’는 <왜요, 그 말이⋯
2021.05.29
[월간삶디] 리본을 달고 손을 들고 행진곡을 부르며

[월간삶디] 리본을 달고 손을 들고 행진곡을 부르며

나는 민중이니까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땅과 바다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게 되는 계절이지요. 내 몸 밖의 슬픔과 고통은 한순간 내 것 같아도 이내 층을 달리합니다, 물과 기름처럼.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흔들어 깨웁니다. 세월호를 일상에서 기억하기 위해 가방에 리본을 달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월 광주를 몸통을 울려 되살리려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미얀마의 비극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 손가락을 치켜듭니다. 우리가 자꾸 돌아보고 함께 묻지 않으면 누군가는 흐뭇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왜’를 묻는 이들에게 ‘떼’를 쓴다고 하고,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을 ‘폭도’라고, ‘돈에 눈이 멀었다’라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4월 21일 낮 세 시쯤이었을까요. 벼리들이 삼삼오오 모여 삶디 들어오는 어귀에 봄꽃을 심었습니다. ‘금잔화, 버베나, 오스테오스펄멈’이라는 꽃이었습니다. 머릿수가 많으니 금방 하겠다 싶었는데, 웬걸. 잡초가 뒤덮고 있어서 고놈들부터 뽑아야 했습니다. 이를 앙다물고 바득바득 한 움큼씩 쥐어뜯었습니다. 땀범벅이 된 동료가 씩씩대며 물었습니다.   “이렇게 뽑아도 또 나겠죠?” 하늘을 향하던 엉덩이를 바닥에 털썩 붙이며 지겹다는 투로 답했습니다.  “그럼요. 장마 지면 싹 다 올라오죠.”⋯
2021.05.04
[월간삶디] 진달래가 필 때쯤, 인턴이 왔다🌺

[월간삶디] 진달래가 필 때쯤, 인턴이 왔다🌺

“일 잘돼요? 쉬엄쉬엄해요.” 이 편지가 잘 안보이시나요? 직장인들은 아침이면 “굿모닝, 오늘 컨디션 괜찮아요?”라며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동료에게 스몰 토크를 시도합니다. 점심엔 감흥 없이 도시락 먹고 양치한 뒤 멍하니 있다가 외식 후 바깥공기 묻히고 들어오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맛난 거 먹었어요?” 회의도 데드라인도 없는 나른한 서너 시, 사탕 하나 찾으며 옆 자리 동료에게 말 붙이죠. “배고프고 졸리다. 일 잘돼요?” 의문문보다는 평서문에 가까운 질문들입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만. 가볍게 손짓하거나 살짝 웃어 보이면 대화 끝. 3월 16일, 청소년 인턴들이 삶디에 첫 출근을 했습니다. 직장인 버릇 어디 가나요. 벼리들은 뻐꾸기처럼 안부를 물었습니다. 인턴들은 무어라 답했을까요. “굿모닝, 오늘 기분 어때요?” “(말 걸기 기다렸다는 듯) 긴장돼요. 긴장 풀려고 빨리 왔어요. 근데 즐거워요.” “맛난 거 먹었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흡족해하며) 비싼 거 먹었어요. 내일부터는 싼 거 먹어야죠.” “배고프고 졸리다. 일 잘돼요? 쉬엄쉬엄해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졸리진 않아요. 안 졸리지만 고되지 않은 건 아니고요.” 열아홉 살에서 스물세 살 사이, 진학하지 않은 다섯 명이 일 년 동안 삶디에서 일하면서 배우기로 약속했습니다. 카페⋯
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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